2024년을 보내며

업체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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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가 쓴 ‘허송세월’이라는 책에는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라는 문구가 있다. 2024년 한 해를 보내며 돌이켜 보니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하염없이 돌기는 했으나 딱히 진전된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며칠 전 회사 근처의 작은 단골 식당에 갔더니 주인 노부부가 감을 깎아 먹고 있었다. 바빠야 할 점심시간에 그 한가로움이 안타까워 말을 걸으니 “코로나19 때보다 더 힘들다”고 했다. 슬픈 마음을 감추고 식당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가족 관계를 물으니 사진 속 자녀와 손자, 손녀를 자랑스레 소개했다. 그 사진이 주렁주렁 감이 달린 풍성한 감나무를 연상케 했다. 이런 가족을 일군 노부부의 인생을 격려하니 그제야 당장의 시름을 잊고 얼굴에 웃음과 희망이 돌았다. 살아서 건강한 가족을 일군 것은 그 인생이 ‘허송세월’이 아님을 증명한다. 

 

연말을 맞아 대학에서 매년 주관하는 입학 40주년 행사에서 축사를 하게 됐다. 올해는 1984년에 대학에 입학해 40년이 지나 이제 60세가 된 졸업생 모임이다. 40년 전 전국 방방곡곡에서 비슷한 학업 능력을 갖춘 청춘 남녀가 대학에 입학했다. 그 후 각자 돈, 명예, 자식을 위해 노력해 나름대로 차별을 일궜다. 그리고 60세가 되어 현직에서 은퇴할 시점에 다시 모인 것이다. 지금부터는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많고, 직업과 직책이 주는 명예와 보람은 지난 일이 되어 간다. 그나마 똑똑한 자식을 둔 자랑과 자부심은 세월이 가도 시들지 않으나, 자식이 아무리 잘났어도 부모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 결국 그간 그렇게 매달렸던 돈, 명예, 건강, 자식, 직업의 우월함도 나이 들면서 서로 차이 없이 비슷하게 수렴해 간다. 40년 전에 벌거숭이 청년들이 올망졸망했던 그 모습처럼 말이다. 

 

평지에 서서 서로를 보면 높고 낮은 키 차이가 드러난다. 어린애처럼 아래에서 위로 아버지를 바라보면 아버지는 실제보다 훨씬 크고 위대해 보인다. 아래에서 위로 사람을 보면 늘 실제보다 커 보이고 세상은 좁게 보인다. 위에서 아래를 보면 사람 간의 높고 낮음의 차이가 없고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다. 잘 늙어 간다는 것은 점점 더 높은 관점에서 세상을 더 넓게 보고 사람을 더 존중하는 것이다. 인생의 지혜로 세상의 욕심을 무디게 하는 것이다. 장례식에 조문을 가면 고인이 살아생전 이룬 업적을 칭송하기보다는 고인이 개인적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성품을 기억하는 조문객이 더 많다. 결국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남기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킨 위대한 업적보다 가족과 주위 사람에게 얼마나 친절했는지, 얼마나 배려했는지, 얼마나 헌신했는지 그 경험을 기억한다. 은퇴한 장년이 이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길이 보인다. 

 

모든 사람은 그 습관과 성품에 약점이 있다. 삶을 통해 나쁜 습관을 좋은 습관으로 바꾸고 좋은 습관을 인격으로 승화시키면 결국 시간이 갈수록 성장해 지도자가 된다. 청년 직원에게 생각을 던지기 위해 한 달에 한 번 회사 정원에 현수막을 건다. 지난 10월의 현수막은 ‘오늘 한 일을 356일 반복하면 내년에는 더 나아질 수 있을까’였다. 매일 무의식으로 하고 있던 일을 그저 반복하면 결국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까. 노력하지 않아도 시간이 가다 보면 언젠가는 행운이 찾아와서 성공할 수 있을까. 지난 11월에는 무언가 시도해 보았지만, 지속할 수 없어서 의기소침한 직원을 격려하기 위한 현수막을 걸었다 ‘가끔 쓰러지지 않는다면 설렁설렁하고 있어서다’ 넘어졌다는 것은 시도했다는 증거다. 어떤 해는 적은 노력으로도 큰 성과를 얻는 행운이 있고, 어떤 해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성과를 얻지 못하는 불운도 있다. 또 가끔은 억울한 일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엔 자기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성장한다. “똑똑한 사람, 성실한 사람보다 큰 압박감을 지속적으로 견딜 수 있는 사람이 큰일을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말이다. 

 

다가오는 2025년 새해 하늘에 먹구름이 짙다. 그동안 개방 시장과 공정 경쟁이 주었던 기회가 무너지니 국제경제 질서에 이성의 힘이 작동할 여지가 없다. 주변의 자영업자, 장년 은퇴자 그리고 청년 직장인 모두에게 올해보다 더 힘든 새해가 다가온다. 우리 국민이 서로를 보듬는 의로운 한 가족 마음을 가지고 고난의 시기를 헤쳐가야겠다. 

 


신동우 나노 회장
케임브리지대 이학 박사, 현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 현 한양대 총동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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